이야기는 이렇게 시작한다.
퇴근은 6시였다. 꼬박 열 시간을 닭장 같은 빌딩에 들어앉아 있었다. 시간은 어떻게 갔는 지 알 수가 없다. 가끔 나는 졸았고, 멍하니 칠판을 쳐다봤다. 피곤하다고 말하였으며 여러번 누군가들과 바람을 쐬었다.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고, 다시 피곤하다고 말했으며 시간이 왜이렇게 가지 않느냐며 불평하였다. 자잘한 단어를 머릿속에 흩뿌려 놓고 퍼즐을 맞추고, 육십명의 사람들이 일어서고 앉는 것과 표정을 지으며 말하고 손짓하는 일련의 과정을 쳐다봤다. 그들 중 누군가는 새로운 소식을 전해주면서 놀란 얼굴을 했다. 어떤이들은 익숙한 조크를 던졌고 어떤 이들은 상냥한 인사를 주었으며 어떤 이들은 진지하거나 장난스러웠다. 어떤 이들은 <무언가>를 했는데, 때마다 나는 <어떤> 반응을 던져 주었으나 그게 어떤 맥락이었는 지 기억하기가 어렵고, 누구와 누구를 구분하는 것이 쉽지 않단 것을 알았다. 내게 보이는 그들은 여럿이지만, 때로 그들은 고작 한명의 사람이다. 피곤하고 졸렸으며, 단순한 기억력은 한계가 명확했다. 꼬박 열 시간을 닭장 같은 빌딩에 들어앉아 있었다.
그건 그냥 개그다. 너도 알겠지만... 그치만 네가 심하게 무표정해지면, 개그가 재미없다기보다 너가 개그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믿는 게 - 나는 좋다.
퇴근은 6시였다. 양복 입은 한무더기의 사람들이 지하철에 올랐다. 저마다의 얼굴엔 피곤이 두껍게 내려앉아 있었다. 눈이 침침했고 객차 안은 지나치게 밝았다. 그들은 웃었고, 나는 옆에 나란히 서서 이사람이거나 저사람의 말을 엿들었다. 그리고 그들이 웃을 때마다 따라 웃었다. 그것은 오늘도 해가 서쪽에서 떴다가 동쪽으로 졌다는 말이었으며, 달에서 방아를 찧던 토끼 두마리가 신혼살림을 차렸단 말이었는데 - 신기하게도 웃음이 나왔다. 대화를 이해한 것도 아니고, 그다지 웃긴 얘긴 것 같지도 않았는데, 어쨌든 웃음은 나왔다. 그러다가 지나치게 밝은 객차의 한가운 데를 거지가, 기어서 지나간다. 거지의 움직임은 달팽이처럼 느리고 끈적하다. 사람들은 돈을 쥐어주는 대신에, 바다라도 갈라지 듯 길을 터주었다. 나는 창가에 바짝 붙어서서 무심코 밖을 쳐다봤다. 귀를 기울이는데, 거지의 라디오에서 이런 노래가 들린다.
친구가 내게 말을 했죠.
기분은 알겠지만 시끄럽다고
음악 좀 줄일 순 없냐고.
네. 그러면 차라리 나갈께요.
그래, 알고 있어.
한심한걸.
걱정끼치는 건 나도 참 싫어서
슬픈 노랠 부르면서
혼자서 달리는 자정의 공원.
다섯 정거장도 못가서 내렸다. 역사는 꽤 컸고, 그래서 출구가 보이지 않았다. 천장에 붙어있을 표지판을 읽는 대신에 - 나는 우유부단하거나 어리버리하게도 그냥저냥 걸었다. 걷다걷다 보니 바깥이었다. 배가 너무 많이 고파서 서둘러 음식점을 찾았다. 닭과 맥주를 주문했다. 그리고
나는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지구의 정적과 우주의 적막을 소탕할 책임을 진마냥 나는 말하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말했고, 말의 결론을 맺기도 전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횡설수설하는 이야기엔 주제나 초점이나 생각이거나 논리가 없었는데 누군가
수없이, <그렇다>고 대답했다. 말이 말을 먹어버릴 때면 <다음에 하여도 좋다>고 다독였으며, 몇번인가 크게 아주 크게 웃어주었다. 때마다 나는 목이 말랐다. 너무 목이 말라서 물을 찾고 있을 때 즈음, 황당하게도 그가 이런 노래를 부른다.
안돼요 끝나버린 노래를 다시 부를 순 없어요
모두가 그렇게 바라고 있다 해도
더 이상 날 비참하게 하지 말아요
잡는 척이라면은 여기까지만
제발 내 마음 설레이게 자꾸만 바라보게 하지 말아요
아무 일 없던 것처럼 그냥 스쳐지나갈 미련인걸 알아요
아무리 사랑한다 말했어도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 때 그 맘이 부른다고 다시 오나요
아무래도 다시 돌아갈 순 없어
아무런 표정도 없이 이런 말하는
그런 내가 잔인한가요
있잖아, 4년만, 4년만 일할 거야. 그러고나서 나도 <유학이나> 가야겠어... 잘은 모르는 일이지만, 꽤 진지해 졌다. 그건 분명히 결론이었지만, 앞서의 얘기와는 맥락이 너무 동떨어졌다. 이번에도 누군가
수없이, <그렇다>고 대답했고, 나는 하마터면 울 뻔 하였는데, 그게 고작 맥주 두잔 마시고 잔뜩 취기가 올랐기 때문이었다. 말은 계속 이어져서 - 닭장 같은 빌딩에 있었던 순간들에 관하여 소개했다. 흥미로운 일이거나 웃긴 일이거나 사사로운 일이거나 사람들 간에 있던 아쉬움과 서운함과 친근함과 애정에 관하여 자못 과장되게 늘어놓았다. 가끔 출퇴근 길을 같이 하는 <친구>에 관하여도 말했다. 믿기 어렵겠지만 저는
그럭저럭, 어쨌든 행복합니다 - 서둘러 결론을 맺고
지하철에 올랐다. 사람들이 지하철을 가득 메웠다. 어떤 이들은 앉아있고 어떤 이들은 서 있다. 귀에 리시버를 꽂은 아이가 다리를 꼬고 앉아서 구두의 끝으로 리듬을 탔다. 객차에 일렬로 달린 손잡이 처럼 구두는 박자에 맞추어 흔들거렸다. 신문을 읽거나 만화책에 얼굴을 파묻거나, 졸음에 겨워 고개를 좌우로 까딱이는 이가 있다. 그래도 어떤 이들은 앉아있고, 어떤 이들은 서 있었다. 그렇지만 어떤 이도 어떤 이에게 말거는 법이 없다. 객차 안에는 열차가 철로위엘 구르는 소리가 메아리 처럼 울린다. 차창 밖을 내다 보지만, 차창 밖엔 내 얼굴이 보인다. 무표정한 얼굴 위에로 한겹의 피곤과 한겹의 막연함이 내려앉는다. 내 뒤에로 초점을 잃은 무수한 표정들이 있다. 시루에 담긴 한줌의 콩나물처럼 <우리>는 서 있다. 머리를 좌우로 움직여 본다. 창에 비친 내 머리가 콩나물 대가리 처럼 흔들거린다고 생각할 즈음, 무료한 지하철의 한 귀퉁이 문을 열고 아저씨가 등장한다. 그의 손에 수레가 이끌려왔고 수레에는 CD가 한가득 들었다. 싸게 모시겠습니다. 최신곡이라며, 감상해 보시라며 틀어 준 노래는
보편적인 노래를 너에게 주고 싶어
이건 너무나 평범해서 더 뻔한 노래
어쩌다 우연히 이 노래를 듣는다 해도
서로 모른 채 지나치는 사람들처럼
그때, 그때의 사소한 기분 같은 건
기억조차 나지 않았을 거야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건 너무 슬퍼
사실 아니라고 해도 난 아직 믿고 싶어
역사에서 집까지 걸었다. 유흥가를 지났고, 좁고 어둡고 조용한 골목을 서너개 지났으며, 두개의 신호등을 기다려 집앞에 도달 했을 때 - 나는 다시 세 바퀴 동네의 주변을 맴돌았다. 그 사이 누군가에게 전화하여 약간의 수다를 떨었다. 이번에도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나는 말하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또다시
말했고, 말의 결론을 맺기도 전에 다른 이야기를 시작했다. 횡설수설하는 이야기엔 이번에도, 주제나 초점이나 생각이거나 논리가 없었는데 누군가...
함께라면 어떤 것도 상관없나요
아니라는 건 아니지만 정말 그런 걸까
함께라는 건 그렇게 쉽지 않은데
그만큼 그만 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우린 긴 꿈을 꾸고 있어
문득 꿈을 깨진 않을까
눈을 뜨면 모든게 사라져 버리는 건 아닐까
마치 없었던 일 처럼
난 눈을 감고 춤을 춰
내가 생각하는 것은 이것이거나 저것. 여기에 있거나 저기에 있는 것. <사소>한 것. 하나마나한 이야기와 알아도 그만 몰라도 그만인 수다들. 단지 나이먹은 만큼 젠체하는 수식어들이 위태롭게 매달려 있고 - 그러나
지금은 일년전의 내가 어떠했는 지 기억하기가 쉽지 않지. 그때의 내가 <슬프다>거나 <외롭다>거나 <힘들다>고 불평하였던 장면을 믿기 어렵지. 그 땐, 그랬으니까. 그치만 나쁘지만도 않았어. 슬프다고 말은 해도 나는 식상한 개그라도 부릴 줄 알았고, 외롭다고 말은 해도 너가 있었으며, 힘들다고 끝이 보이지 않는다고 말은 했지만 그럭저럭, 그럭저럭 견뎌냈으니까. 하루하루의 시간은 길고도 지루했지만, 한달은 지나갔고 일년은 어찌 지나갔는 지 기억하기도 어렵지. 슬펐기 때문에 때때로 행복한 것을 알았고, 외로웠기 때문에 일일이 그들의 소중한 것을 곱씹어 보았으며, 그러니까 말야
그러니까 말야...
p.s.
인용한 가사는 <브로콜리 너마저>의 곡. 핸펀에는 더도덜도 말고 딱 네개의 곡이 들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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