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10월 5일 월요일

젊은이의 양지 (A Place In The Sun, 1951)


제목에 끌렸다. <젊은이의 양지>가 뭔지 모르지만, 혹은 뭐여야 하는 지도 말하기 어렵지만, 그 단면을 보여주는 영화겠지. 모르긴 몰라도 포스터처럼 따뜻한 느낌일 게다. Sun이라질 않는가. 그런데

젊은 촌놈은 갑부 삼촌만 믿고 도시로 와서는 삼촌의 공장에서 일한다. 거기 여공에게 다짜고짜 들이대다가, 도시의 외로움을 달래다가, 급히 사랑에 빠지고 여자는 임신한다. 그러다 갑부집의 이쁜 딸내미를 사교계에서 만난다. 역시, 사랑은 손쉽게 빠진다 - 고전 영화서 흔하게 보이는 이 화법은 드라마가 생략된 탓에 전혀 익숙하질 않은데, 단지 빠른 전개를 돕는다는 의미에서 긍정적이다, 그게 드라마보다 영화를 선호하는 이유다. 어쨌든 남자는 조강지처를 차버린다. 차버릴라고 한건 아니고 그렇다고 안차버릴라고 한것도 아닌데, 그 우유부단한 고민의 한가운데서 남자는 여자를 <얼결에> 죽였고, 해서 사형선고를 받는다.

중후반까지만해도 문제는 조강지처를 차버려도 되는지 안되는지로 요약됐다. 조장지처는 버리면 안된다. 그런 줄은 알지만, 버리면 안되는 조강지처는 늘, 버려질 운명에 놓인다. 문자 그대로 보자면, 조강지처는 암울한 과거이며, 이제 성공을 거둔 남자에게 더이상 필요하지 않은 존재다. 남자 앞에는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여자들이 번호표를 끊고 순번대로 목이 빠져라 기다린다. 조강지처는 옵션이다. 버리면 안된다는 성현의 말씀은 들어 봤으되 - 버린다고 지장될 것이 없으며, 때로 더 나은 발전을 위한 차선이기도 하다. 더욱이 조강지처와 함께하던 가난하고 지리멸렬한 때는 아직 젖살이 덜 빠진 애송이였다고 <굳이> 회고하기도 할 일이다. 그리고 여자를 차버린 댓가로 남자는 <비인간적>인 인간이 된다. 말이 그렇다면, <젊은이의 양지>는 도대체 어디 있지? 생각은 하고 있는데

후반부의 흐름은 별로 전형적이지 않다. 남자가 조강지처를 죽이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데, 영화속 배심원과 판사는 아닐지라도, 관객은 그 진정성을 믿어줘야할 것처럼 보인다. 남자가 장미빛 미래를 약속하는 돈 많고 이쁜 <새 여자>를 사랑한다고 말 하는데, 게다가 <새 여자>도 사형선고를 받은 남자를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주장하는데, 이 말도 의심없이 믿어줘야할 것 같다. 낌새가 수상하지만, 한없이 순수한 사랑 같은것. 굳이 말하자면, <젋은이의 양지>는 남자의 후회와 그들의 뼈 아픈 사랑에 있다. 그렇긴 하지만

그들의 사랑이 스크린 뒤편에서 얼마나 두터웠는 지 알 수가 없고, 내가 본 것은 오로지 스피디하고 심플하고 우연스런 감정들이다. 어째서 여자가 남자를 좋아하는 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는 사랑 - 그게 <젊은이>의 전유물이라면 할 말은 없지만. 게다가 어떤 젊은이에게도 추천하고 싶지 않은 <양지>다, 그가 조강지처가 될 가능성이 농후할 경우에는 더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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