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편의 한국근대소설처럼 - 무미건조하며 지나치게 심드렁하다. 게다가 <주제>란 것이 있어 보이며 (세상에 주제 라니...), 이를 표현하는 방식도 도식적이다. 강 주변에 있던 오래된 마을이 개발로 인해 파괴된다. 마을은 저마다에게 삶의 터전이거나 추억이거나 인생이거나 할 일이다. 그게 <사라진다>는 게 어찌나 슬픈 일인지 일면식 없는 두 남녀를 통해 보여준다. 포스터에 나란히 서서 엉뚱한 방향을 응시하는 이 둘은 절대 만나는 법이 없다. 그러니 굳이 두명이어야 하는 이유란 없다. 네명이어도 되고, 그러면 영화는 정확히 두 배의 러닝타임을 갖을 게다. 어쨌든
그들의 삶은 사라져가는 마을만큼이나 어수선하다. 남자는 16년만에 아내를 만났고, 여자는 2년만에 남편을 만나지만, 그동안 왜 연락이 없었는지 왜 하필 지금에야 만나려고 기를 썼는 지, 앞으로 그들의 인생이 어떻게 될 것인지는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 <한국근대소설>을 해석하는 정형화된 기법을 갖다 대자면, 그들의 미래는 사라져가는 마을처럼 - 그와 정확히 똑같은 분량으로 - 불투명하다. 영화가 즐비하게 늘어놓은 <사라져가는 것>이 共感되는 만큼 그들의 삶도 이해된다. 그러나 한번도 가본일 없는 중국 어딘가에 놓인 강 이라니. 나는 낙동강도 어데 붙었는 지를 모른다. 그 강을 끼고 있는 마을이 사라져 갈 운명이라니. 먼 옛날 줏어 읽은 <성북동 비둘기>에 대해서도 나는, 안타깝게도, 그닥 연민을 느끼지 못했다. 늘 그렇듯, 시의 <요약>된 주제는 <암기>했는데, 그게 이 영화의 <주제>에서도 벗어나지 않는다. 초등학교 때 도시화로인해 겪는 향수를 <약간> 알았다. 고향에 갈 수 없단 게 아니라, 이전의 고향이 더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답없는> 허전함이다. 그러나 이런 류의 영화에 추억을 투영하기엔, 나는 너무 어린 나이였다.
등장인물의 연기는 - 이건 연기를 한달 수도 없고, 안 한달 수도 없는 노릇인데, 그들은 대사를 줄줄 읊어 대지만 표정과 몸은 경직되어 있다. 연기자는 자고로 일상보다 과장된 연기를 해야 한다. 영화의 연기는 과장되어 있고, 연극은 이보다 더하다. 그들이 놀랐거나 슬프거나 외롭거나 짜증난다는 걸 백미터 밖의 행인도 알아챈다. 하지만 이 영화에선 절대 안그렇다. 대화를 잘 들어봐야 겨우 안다, 슬픈지 놀랐는지 외로운지 화가 났는 지를. 마치 스크린에 끊임없이 출연하는 산이거나 바다이거나 무너져내린 집들과도 그닥 다를 것이 없다. 알고 보니, 제목 Still Life는 靜物이란 뜻이다. 이거 참 심심한 영화로구나 - 생각할 즈음 엉뚱하게도 홀연



다행이란 생각이다. 이 영화는 참 <일상>답다. 우리 주변에선 늘 무언가가 무너진다. 당연히 그래야 한다는 듯 다른 대안이 없지 않느냐는 듯, 식상하고도 따분하고도 엉성하게 무너진다. 그럼에도 무너지는 건 늘, 치명적이다. <그래, 가끔 하늘을 보자>란 외침 마냥 하늘을 보지만, 하늘은 일상보다 더 무미건조한데... 이때 UFO라도 지나가면 얼마나 즐겁고 감사할 지! 혹은 내가
당신이 걷는 쓸쓸한 길을 장식하는 UFO이거나 날아오르는 건물이거나 전깃줄을 타는 인간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 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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