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8월 19일 목요일

13층 (1999)


이건 좀 묵직하다, 오랜만에.

영화 매트릭스에서 인간은 기계에게 등쳐먹힌다. 아는 거라곤 0과 1밖에 없는 - 단순하기 이를 데 없는 쇳덩어리에 휘둘리다니 열받지 않을 수 없다. 숭고한 진실은 아직 우리의 깊은 곳 어딘가 감취어 있고, 따라서 미개한 외부의 적은 전의와 동료애를 업그레이드 시켜준다. 적어도 뜨거운 <목표의식>은 갖는다. 그게 곧 삶에의 의지다. 그런데 만약, 우리 내부에 아무것도 없다면 어떨까.

그것이 영화가 말하는 <세상의 끝>이며 진실이다. 암만 배부른 도야지보다 굶주린 소크라테스가 낫다지만, 이럴때도 진실을 알려고 피똥을 쌀까. 진실은 완벽하며 비현실적인고로 언제나 진실에의 추구는 현재 진행형이어야하지만, <세상의 끝>이 0과 1으로 이루어진 경우에, 진실은 현실보다 더 거칠고 투박해진다. 더는 탐구의 대상이 아니며, 이상향일수도 없다. 모르는 게 약인 거다. 의도하진 않았으나

스크린 밖의 우리에게서 진실이 지극히 추상적인 개념으로 이해되는 건 불행중 다행이다. 아직 그것은 추구해야할 <무엇>이다. 양파껍질 까듯 한꺼풀씩 벗겨가며 다가서야할 무엇이다. 해야할 숙제가 있다는 것, 무지로 인해 겸손을 배우는 것은 작지않은 행복이다. 그런데 진실이 극히 단순한 덕에, 쉽사리 그 정체를 파헤친 영화속 그네들이 부러운 건 - 우리의 진실이 우리에게 우호적인 지 아닌 지를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진실의 존재조차 확언할 수 없다. 그것은 거대한 <믿음>의 철옹성이다.

단지 고행의 길이 힘든 만큼 해탈의 경지가 값질 거라고 미루어 짐작한다. 아무도 해탈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설명해 줄 수 없다. 도대체 <해탈>은 존재하기는 하는 건지. 그렇지 않더라도 혹, 진실은 적어도 정직하기는 한가. 노력한 이에게 정확히 그만큼의 제 모습을 보여주는가. 아니면 조삼모사로 농락하듯, 매번 고만고만한 분량의 사실을 약간씩 다른 각도로 보여주는 뿐인 걸까. 한계을 직감하며, 도토리 키재듯, 우물안에서 우물의 깊이를 재는 새로운 방식을 알아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하는 걸까. 어쨌든, 모르는 게 약이니까 말이다.

덧, 영화의 끝이 해피엔딩인 것은 불만이다. 수천개의 세상은, 윤회를 상징하듯, 저마다 서로에게 물려있어야 했다. 인상적인 장면은 포스터에 그려진 - 세상의 끝을 바라보는 인간인데, 영화의 끝은 그 인간에게 탈출구를 제시하는 것처럼 보인다. 이래서는 현실에의 메타포를 구성할 수 없다. 명확한 해답/탈출구는 <진실>보다 더 머나먼 곳에 있어야 한다. 

2010년 8월 8일 일요일

인셉션 (2010)


초반에 좀 졸았다. 한 삼십여분 정도. 어려운 영화라고, 썰을 푸는 영화라고, 시간내내 눈을 떼지 못했다고 - 누군가 그랬기 때문에 스토리를 따라가지 못할까 걱정이 되었는데, 기우였다. 영화는 길었고, 스토리는 플롯에 관하여라면 비교적 심플했다.

기대가 많았기에 당연, 이상한 점들이 더 눈에 띄었다. 일테면 매트릭스와 비교하기엔 소재가 참신하지 않다. 꿈은 누구나 꾸지만 매트릭스는 아무나 접할 수 없다. 꿈과 현실의 경계는 대체로 명확하지만, 매트릭스 안에서 매트릭스와 현실의 경계는 모호하며 이해불가하다. 또한 무의식/꿈 그 자체를 논리와 증거로 연구하기 어렵지만, 흔적을 찾기란 어렵지 않다. <인셉션>은 차라리 <세뇌>에 가까우며, 세뇌는 (매트릭스와는 달리) 갖가지 사회화를 경험하는 인간에게 의문의 대상이 되기 어렵다. 세뇌가 불만이라면 지구를 떠나면 되니까. 흔하다는 이유로, 꿈은 호기심을 이끌어 낼 만한 소재가 아니다. 물론 사소한 <일상>도 영화의 소재가 될 수 있지만, 그 때는 스토리텔링이 문제가 된다. 적어도 이 영화는 모두가 알고 있는 <사소한> 꿈을 <색다른 방식>으로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영화는 완전히 다른 <꿈>을 가정하고 <룰>을 만들어 그 꿈을 정의한다. 꿈에서 총 맞으면 깨어난다는 둥, 한방에 죽지 못하고 서서히 죽어버리면 깊은 잠에 빠진다는 둥, 꿈속의 꿈은 시간이 제곱으로 늘어난다는 둥, 꿈에서 볼을 꼬집으면 (꿈을 인지하는 게 아니라) 볼이 아프다는 둥 - 기타 등등의 속성은 급조된 냄새가 나기 때문에 매뉴얼이 짧을수록 좋지만, 별로 그렇지 않았다. 아무개가 등장하면 설명하고, 설명하고, 못 알아먹었을까봐 또 설명한다. 때문에 틈틈이 졸아도 그들이 지칭하는 <꿈>을 이해하는 데 크나큰 도움이 된다. 관객에대한 과도한 배려는 영화가 말하고자하는 바가 얼마나 개연성이 적은 가를 반증하며, 동시에 그런 이유로 실감을 떨어뜨린다.

한편, 누구나 꾸는 <일상>의 꿈을 <새로운> 꿈으로 정의하는 건 어쩐지 불편하다. 첫번째 꿈에서 그들이 공중에 떠 있으므로 두번째 꿈속의 그들도 공중에 떠 있다. 그치만 세번재 꿈속의 그들은 왜 안뜨는가. 이것 말고도 그들이 느슨하게 정의한 <꿈>은 일상에서 접하는 지극히 일관된/논리적인 꿈의 작용과 오버랩된다. 조는 동안 매뉴얼이 추가 됐나? 알게 뭐람, 영화가 그렇다는데야. 언제부턴가 si-fi 를 자칭하는 영화일수록 논리 따위를 찾기가 더 어려워졌다. 들키지 않으려면 그들은 최대한 말을 아끼고, 매뉴얼을 추상화 시켜야한다.

영화를 본 날 저녁, 아무개가 아무개의 블로그 글을 읽어보라며 링크를 걸어줬다. 글은 영화보다 더 길었고, 뭔말인지 이해도 안됐지만 - 프로이트/융/라캉의 이름이 나왔다들어갔다 했다. 이 영화가 꿈/무의식에 대한 얘기였나? 제목 <인셥션>, 혹 <세뇌>는 그들이 꿈속에 들어가야할 이유이며 행불행의 시작이었다. 그러나 <세뇌>의 도구가 굳이 꿈이어야할 필연은 전혀 없다. 또한 무의식에서 비롯된 강박이 어떻게 작용하는 지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고 싶은 거라면 - 모든 영화가 그렇지 않은가. <인간>이 등장하는 영화에 <주제>가 있다면 - 그 인간의 무의식은 보여주지 못할 지라도 흔적은 끊임없이 제시된다. 극적인 캐릭터들 참 많다. 연구가 필요한 미친 캐릭터도 많다. 그에 반해 <다른 세계가 있을 거>라고 믿는 마누라의 강박은 너무 그럴듯해서 극적이지 않다. <강박>이 요지라면, 제작자는 종교에 빠진 광신도에 관한 내용으로 저렴하게 목적을 달성했을 것이다. 그러니 이 영화가 볼만한 이유는

몇개 꿈을 겹쳐놓고 벌이는 긴박감과, 남의 꿈속에 들어간다는 SF스런 설정에 있다. 스릴러물을 좋아하는 일인으로서, 충분히 만족스러웠지만 지나친 썰은 모르겠다. 과연, 꿈보다 해몽이다.

2010년 7월 30일 금요일

낯술

 

노영석이 누구냐. 난 또, <노동석> 인 줄 알았지. 학부 때, 노동석의 영화를 보고 리포트를 쓴 기억이 있어 이 영화를 보게 됐는데, 감독 프로필을 암만 봐도 <마이 제너레이션>에 관한 얘기가 없다. 검색해 보니, 영 딴 사람이다. 미리 알았다면 안 봤을 거다. 뭐냐 이 영화 - <낯술> 이라니.

 

술과 여자의 공통점, 남자라면 거절할 수 없다니 - 마초 영환가. 그러나 이건 그저 자극적인 광고 카피일 뿐이었다. 영화는 말한다. 때로 거절해야할 여자도 있다고. 때로는 술도 작작 먹어야 한다고. 낯술일 경우엔 더더욱 그러한데, 낯술이 곧 밤술 되고, 와중에 무슨 봉변을 당할 지 알 수 없는 노릇이라고. 그러나 줄거리와는 전연 상관 없이 저 문구는 대체로 옳다. 결국 남자는 본능에 따라 술/여자를 찾아 다닌다. 욕구에 관한 얘기다. 깔끔하거나 아름답거나, 무슨 디테일 따위가 있을 리 없다. 그런 류를 스크린에서 재확인하는 건 낯설고, 웃긴다. 제가 낯술 처마시는 건 낭만이거나, 혹은 무슨 심오한 사정이 있어서라지만, 벌건 대낯에 취해서 돌아다니는 타인은 하나같이 꼴불견이다. 해서 적어도

 

웃긴 영화는 된다. 나도 가끔 저랬을까. 군대서 축구한 얘기만큼 재미없는 스토리도 없다는 데, 낯술 먹고 여자에 관해 - 이별과 미련과 애증에 관해 꼬부라진 혀로 떠듬거리는 것도 그에 못지 않다. 그러니까 이건 낯술을 즐기는 이들에게 반성의 여지를 남긴다 - 라고 굳이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왜 이 영화가 포스터에 나붙은 이러저러한 상들을 받았고 그걸 밑천 삼아 관객을 꼬득이는 지 궁금해하다 보면 말이다.

2010년 7월 3일 토요일

하하하 (2009)

 

오랜만에 웃긴 영화. 제목 마저도 <하하하>.

 

홍상수 영화서 술이 빠진 일이 없던 것 같다. 이 영화의 한 대사처럼, <어색한 분위기선 술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의 영화가 연출하는 장면과 대사는 하나같이 어색하고, 기어이 술이 등장한다. 어색한 입장에 서지 않았기 때문에 내게는 굳이 술이 필요하지 않으며, <하하하> 웃는 여유가 생긴다.

 

이번엔 영화가 통째로 술안주거리다. 시작하자마자 두 남자가 마주앉아서 영화가 끝날 때 까지 대화를 나눈다. 술 한잔에 한대목의 얘기가 오간다. 그러다가 술이 적잖이 오르면 대화는 어디로 갈까.

 

진지해 진다. 솔직하고 진실해지기 위해서, 방어막을 해제하기 위해서 술을 마시니까. 그런데 무장해제된 인간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퇴행한다. 지나치게 친해진 사이에게 존경이 없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다. 말이 많으면 들킨다. 의미를 과도하게 부여한 단어는 그 의미가 갈수록 부정확해져서 오히려 우스개 소리가 된다. 내가 글 쓰는 것도 이하동문. 그러니 홍상수는 방어막을 잘 친 셈이다. 제 영화를 우스개로 만들지 않고, 제 영화가 보여주는 것들이 우습다고 말하기 때문에 그 예리한 지적질 덕으로 인정도 받는다. 게다가 우스운 정도와 비례해서 씁쓸함도 더해지는 데, 왜냐하면 이 모든 것이 우리 각자의 일상과 똑닮았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하하> 웃는 것은 차라리, 자기비하에 가깝다. 그렇다면 - 내 쓰는 것(혹은 현실)이 어찌나 웃긴지 내가 더 잘안다고 떠벌리는 것으로, 일테면, 그런 류의 비겁한 자기비하로, 내 쓰기의 방식이 덜 우스운 것이 될까. 그렇진 않을 것이다. 이 슬픈 자기비하에는 그 얘기를 애초에 시작한 감독부터가 예외일 수 없다.

 

이 영화를 다른 이에게 권하고 싶은 것은 - 내가 술취했을 때나 취하지 않을 때, 멀쩡하게 그냥저냥 살 때, 혹은 지나치게 진지해져서 그 누구도 모를 의미의 단어들을 아무렇게나 엮어낼 때, 내가 어떤 순간 솔직해졌다고 말할 때, 폼 잡고 글을 쓸 때 - 이 모든 것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기 때문이다. 명쾌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면, 그저 <하하하> 웃어 달라고 부탁하고 싶기 때문이다. 왜냐면 영화서 보듯이 - 나만 그런 게 아닐 테니까. 너도 그럴 테고, 너의 진지함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길 원한다는 것을 내가 알 테니까. 그런데 그 얼마나 다행인가. 대부분의 사람들은 술자리서 벌어진 일들에 흔쾌히 면죄부를 허락하는 것처럼 보인다. 모두가 알지만 정작 따져묻지 않는 것 - 재미는 바로 거기서 시작한다. 게다가 이 공감대속에는 정말이지, 의외의 애정이거나 연민 같은 것이 녹아있다. 원래... 그런 거니까. 누구나... 그럴 테니까.

 

와중에, 역시, 문소리가 제일 멋지다.

 

와우.

2010년 6월 24일 목요일

예언자 (A Prophet, 2009)

 

무슨 내용인지 줄거리를 말하기는 전혀 어렵지 않지만, 고상한 의미를 취하긴 어렵다. 뭘 예언했다는 거지? 결국 - 제목이 왜 <예언자> 인지도 모르겠다.

2010년 6월 20일 일요일

매트릭스로 철학하기


생각나서 매트릭스를 다운받아 봤다. 1편은 볼만하고 - 그래서 이 책은 1편에 관해서만 얘기하고, 후속작은 보다가 접었다. 예전에도 2,3편을 모두 봤지만, 뭔 얘기인지 제대로 이해한 것 같진 않다. 아무래도 그들은 <승리>했을 것이다.

정말 매트릭스란 것이 존재한다면 어떨까. 이렇게 가정하는 것은 마치 내가 내일 죽는다면, 지구가 멸망한다면 어떠냐고 가정하는 것과 마찬가지여서, 이어지는 모든 썰들은 사실, 하나마나한 소리다. 불가해하기 때문에, 얘기가 길어질 수록 불안만 가중시킨다. 그럴 수도 있지만, 아닐 수도 있는 일이고, 결론을 아무도 알 수 없으므로, 이런 류의 소재는 술안주로만 어울린다.

<실존>은 지나치게 신성한 단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거칠고 투박한 존재에 관하여 의심을 품으면, 그리하여 한꺼풀 벗겨진 약간 더 날것의 실존을 알더라도, 실존을 향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는다. 존재는 시간이고, 시간은 한정되어 있으므로 - 바로 그런 이유로 존재에 집착하는 건 시간 낭비다. 집착으로 우리의 키를 한 자 더 늘릴 수 있을까. 집착은, 차라리, 가장 흔하게 접하는 매트릭스다.

세 승려가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에 관해 썰을 푼다. 첫번째 승려는 깃발이 어떻게 움직이는 지를 말한다. 다음 승려 왈, 실제로 움직이는 것은 깃발이 아니라 바람이라고 한다. 세번째 승려 왈,

 움직이는 것은 당신들의 마음이다.

 
숟가락은 없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도 없다. 그런데 어떡하지? 손가락이 없으면 달을 가리킬 수 없는데.

2010년 6월 13일 일요일

집착

후배 하나가 곧 유학간다. 가기 전에는 자주 만나자고 - 나는 말했다. 그는 자기가 없은 후에도 내게 말상대가 있는 지를 걱정했다. 내게 혹여나 있을 외로움 같은 것...

하루종일 비가 왔다.

요 며칠사이 어금니가 심하게 아파서, 가끔 밥을 먹다가도 식은 땀을 흘렸다. 날씨는 후덥지근 했다. 그러나 이빨이 시린 건 또다른 문제다. 사랑니를 빼기로 작정했다. 엇그제 동네 치과에 갔을 적엔 대학병원에 가보란 소릴 들었다. 두어줄의 소견서도 적어줬다, 의사란 양반이.

며칠전 들어온 신입 사원이 알은체 했다. 아무개 교수 수업서 조교를 하지 않았냔다. 그렇다고 했다. 삼년도 더 지난 일인데, 그걸 기억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애써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더이상 묻고 답할 말이 없었으므로, 복도 한가운데 나란히 서서는, 복도 한가운데의 풍경을 구경이나 하듯 멍하니 섰다가, 나는 다시 오랫동안 사용해보지 않은 입가의 주름들을 씰룩거리며 - 왜 이 회사엘 들어왔냐거나, 언제 졸업했냐거나,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싶냐는 둥의 물으나마나한 것들을 이어 물었다. 그는 머라머라 대답했지만, 그 머라머라한 대답 중의 하나도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하루종일 비가 왔다. 저녁엔 월드컵 경기가 생방송이었고, 어디선가 모여있을 누군가들의 머라머라하는 함성이 가끔 동네 여기저기서 단발적으로 울려나왔다. 와중에 나는 영화를 봤다. 공포나 액션 같기도 한, 또는 드라마 같아서 뭔가에 관한 썰을 푸는 듯, 이것이거나 저것이거나, 영화 속에선 무척이나 중요한 어떤 이들의 삶과 철학과 관계들에 - 늘 그렇듯 나는 빨려들어갔고 시간은 무성의하게도 잘 지나갔으나, 그것이 도대체 무엇에 관한 얘기였는 지를, 이제와서 말하기는 참 어렵다. 난해하다기 보다 - 도무지 아무래도 상관이 없어서 기억하기 어렵다. 누가 뭐라는가. 영화가 그렇다는데. 

하루종일 비가 왔고, 습한 바람이 불었다. 왜 사느냐

대답 대신에, 아무도 자기가 왜 사는지 자문하지 않는 건 삶을 바꾸기엔 너무 늦었거나 혹은 원하는 것을 했을 때의 초라한 보상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 거라고 얘기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 뭘 하고 싶은 지를 모른다는 사실일 것이다. 와중에 내가 그것을 했어야 했어, 조금 더 이른 나이에, 그렇지 않았기에 지금 삶의 꼬라지가 이 모양이지만, 나도 더 화려해 질 수 있었지 라며 - 때로 코흘리개 아이들을 모아놓고 인생에 대한 이러저러한 조언도 해줄 일이다. 나는 - 무엇을 하고 싶을까.

아무개가 펜을 달라고 한다. 필통을 까고, 나는 내가 제일 아끼는 알록달록한 젤리펜을 건넨다. 아니 그게 아니라, 난 지금 필기를 하려는 거지 색칠을 하려는 게 아니잖아. 왜 젤리펜 따위를 주고 그러니. 그래 거기 모나미 볼펜이나 줘. <눈치>가 없어, 애가 - 라고 핀잔을 준다. 미안, 다음엔 잘 줄께. 그리고 이튿날 그가 펜을 달라고 했을 때 나는 다시 젤리펜을 건넨다. 그는 화가 났을 테고, 내 눈치없음을 경멸할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은 흔하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네가 무슨 펜을 원하는지 도무지 관심이 없다. 내 관심에도 분야란게, 방향성이란 게 있다. 만약 내 관심이 너에게 꽂혀 있다면, 나는 네가 일분에 몇번의 숨을 들이 쉬는 지, 네 동공의 초점이 하루에 몇번이나 내게 머무는 지도 설명할 줄 알겠지. 그러나 나는 네게 <사실>을 말하지는 못한다. 다만 눈치없음이 못내 미안할 뿐이지만... 그렇다면 도대체 나는 왜 너와 같이 있을까. 나는 - 어디에 있고 싶었을까.

며칠 사이 읽은 알랭 드 보통의 <젊은 베르테르의 기쁨>은 요약이 잘 되는 책이어서, 적당히 유용했는데, 나는 아무개와 커피 한잔을 하며 그 책을 <일목요연>하게 요약할 줄을 알게 됐다. 거칠게 하면 이렇다.

소크라테스 - 왕따를 당했다고 느끼지 말고, 네가 왕따를 시켰다고 믿어라.
에피쿠로스 - 우리가 그토록 원하는 <수단>으로써의 돈은 정말이지 수단일 뿐이라서, 사실 돈이 없어도 원하는 것을 갖기란 그다지 어렵지 않다.
세네카 - 운명의 여신에 의하면 너는 언제든 축복 받을 수 있지만, 지금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는데, 그 <가능성>을 무시하지만 않는다면, 적어도 죽음에 임박했을 때 지나치게 황당해하진 않을 것이다.
몽테뉴 - 지혜에 보탬이 없는 지식이란 것이 무슨 소용인가.
쇼펜하우어 - 삶이란 생에 대한 맹목적 의지. 우리의 사랑엔 아무 심오함이 없다.
니체 -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초인이 되기위해 필요한 노력은 값지다.

이런 말들은 적당히 위로가 되지만, 그 위로를 인정하기란 쉽지 않다. 쇼펜하우어의 "천재성을 타고난 사람이 좀처럼 사교적이기 어렵다"고 말한 대목은 닭살이 돋는다. 위로는 자의적인 해석에 근거한다.

고통이 우리를 승화시킬까. 며칠사이 치통으로, 거의 기절하듯 잠들었다. 치통은 -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그것도 고행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 내 신경을 가라앉히기보다 곤두 세웠다. 다른 몇날은 진통제 탓으로 정신이 혼미했다. 금욕이 인간에게 득이 될까. 착한 사람 - 아무런 욕망을 흘리지 않는 사람은 노련한 인간이거나 혹은 그가 흘리는 사소한 욕망의 흔적들을 감추지 못하는 가련한 존재다. 에너지가 없어지지 않고 다만 이동하듯 욕망도 마찬가지라 여겼다. 그렇다면 금욕이란 뭘까. 고통이 내게 도를 가르칠까, 아니면 나를 타락 시킬까.

------------------------------ 절취선 ----------------------------

그 사이 책도 더러 읽고 잡다한 영화도 많이 봤지만, 블로그질은 <어떤> 의무감 때문에, 바로 그 <의무감이 든다>는 이유로 충실하지 못했다. 적어 놓지 않은 책과 영화의 줄거리는 쉽게 잊어버렸다. 때때로 나는 무언가를 쓰려 했으나, 쓰다가 쓰다가

쓰려는 목적을 잃어버렸고, 대책없이 횡설수설이다.

이 푸념같은 글이 어떻게 끝날 지 알 수 없지만, 지워버리지 않는 것은 - 내가 나아지는 방식이 적어도 <인내>는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배설>해야 한다, 아무래도. 그래서 생각 중이다. 고통이라고 부르기도 뭣한 - 잡다하고 사소한 집착이 내게 도를 가르칠까. 고통이 우리를 승화시킬까.

후배 하나가 유학간다. 그런 이유로 나는 가끔

외롭기도 할 일이다. 더 늦기전에 나는, 하고자하는 말을 입벌려 말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